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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잡은 다음 #2: 진통제 말고 치료제

부제
큰 나라들이 큰소리를 내는 이유, 그리고 성장을 만드는 자리에 대하여
URL
작성일
2026/10/18
James Gillray, The Plumb-pudding in danger; or, State Epicures taking un Petit Souper (1805). 지구를 썰어 나눠 먹는 피트와 나폴레옹. Public domain. 크기 조정 외 변경 없음.
※ 이 글은 「따라잡은 다음」 연작의 2편이다. 1편에서는 회사 안쪽에서 기업 연구소의 역할을 물었고, 2편에서는 회사 바깥으로 시야를 넓힌다. 필자는 LG AI연구원에서 일한다. 이 글은 회사 입장이 아닌 개인 의견이며, 2026년 10월 18일까지 공개된 자료만 썼다. 인도의 선거인 명부 시위처럼 지금 진행 중인 사건은 이후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들어가며: 1편 다음에 남은 질문

1편에서 나는 기업 연구소가 따라잡은 다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결론은 한 문장이었다. 이 연구가 어느 현장의, 누구의 일을 바꿨는가.
그 글을 올리고 나서 질문이 하나 남았다. 이게 왜 하필 지금 이렇게 급한가. 연구소 하나의 생존 문제라면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 그런데 요즘 국제 뉴스를 보면 그럴 여유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큰 나라들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잡아가고 그린란드를 "우리 것"처럼 말한다. 러시아는 5년째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중이다. 중국은 소수민족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묶는 법을 새로 만들었다. 인도는 힌두 민족주의 정부 아래에서 선거인 명부를 다시 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걸 주로 지도자 개인의 문제로 읽는다. "트럼프 때문에 미국이 망조가 들었다", "푸틴이 미쳤다" 같은 식이다. 그런데 네 나라가 동시에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개인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내가 떠올린 가설은 이렇다. 큰 나라 안쪽에서 나라를 쪼개려는 힘이 커지고 있고, 정치는 그 힘에 반응해 바깥을 향해 소리를 키운다. 패권주의는 바깥을 향한 야망이라기보다 안쪽을 붙잡아 두려는 몸부림일 수 있다.
이 가설을 따라가다 보면 1편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이 글도 셋으로 나눴다. 1부에서는 큰 나라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진단한다. 2부에서는 패권주의가 진통제라면 치료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AI가 그 치료제가 될 수 있는지 따진다. 3부에서는 다시 연구소로, 마지막에는 그 안의 주니어 연구자인 나의 자리로 내려온다. 이번에도 조금 길다.

1부. 큰 나라들은 왜 큰소리를 내나

큰 나라는 원래 쪼개지기 쉽다

경제학자 알베르토 알레시나와 엔리코 스폴라오레는 『국가의 크기(The Size of Nations)』에서 나라의 크기를 하나의 거래로 설명했다. 나라가 크면 국방, 도로, 화폐 같은 공공재를 많은 사람이 나눠 부담하니 1인당 비용이 싸다. 대신 사람이 많고 다양할수록 "우리가 원하는 정책"이 서로 달라져 갈등 비용이 커진다. 나라의 크기는 이 규모의 이익과 이질성의 비용 사이 어딘가에서 정해진다. (Alesina & Spolaore)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무역이다. 국경이 곧 시장의 경계라면, 큰 나라에 속해 있어야 큰 시장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무역이 자유로우면 작은 나라도 세계 시장에 물건을 팔 수 있다. 그러면 굳이 마음 안 맞는 큰 나라에 붙어 있을 이유가 줄어든다. 그래서 이들은 경제 통합과 정치적 분열은 함께 간다고 정리했다. 반대로 보호무역의 세계에서는 큰 나라라는 사실이 훨씬 중요해진다. (Spolaore)
실제로 1945년 51개국으로 출발한 유엔 회원국은 지금 193개국이다. 탈식민지화와 소련 해체가 큰 몫을 했지만, 냉전 이후의 자유무역 질서가 '작아도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준 것도 사실이다.
이 틀을 들고 보면 질문이 조금 바뀐다. 지난 30년의 개방된 세계는 큰 나라를 하나로 붙잡아 두던 접착제를 조금씩 녹여왔다. 그렇다면 지금 큰 나라들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네 나라의 원심력

미국: 지리가 된 양극화. 2026년 2월 유고브(YouGov) 조사에서 미국인의 18%가 자기 주의 분리 독립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캘리포니아는 27%로 가장 높았다. 더 눈에 띄는 건 방향이다. 2024년 조사에서는 공화당 지지자가 분리에 더 적극적이었는데, 트럼프 2기인 올해는 민주당 지지자(22%)가 공화당 지지자(14%)보다 높아졌다. (YouGov) 2021년에는 남부 공화당 지지자의 66%가 남부 연합 결성에 찬성한다는 조사도 있었다. (Bright Line Watch 인용) 누가 백악관에 있느냐에 따라 "나가고 싶은 쪽"이 바뀌는 것이다.
러스트벨트는 이 균열의 경제적 뿌리를 보여준다. 데이비드 오터 등은 중국산 수입품이 급증한 지역일수록 온건한 의원이 밀려나고 양극단 후보가 당선됐으며, 대선에서는 공화당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보였다. (Autor et al.) 경제지리학자 로드리게스-포세는 이것을 "중요하지 않은 곳들의 복수"라고 불렀다. 성장에서 소외된 지역이 투표로 체제 자체를 흔든다는 뜻이다. (Rodríguez-Pose)
인도: 중앙과 지방의 줄다리기. 인도에서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인 명부 특별 집중 재검토(SIR)가 불씨가 됐다. 2025년 비하르주에서 시작된 이 작업은 올해 서벵골 주의회 선거에서 정점을 찍었다. 명부에서 약 900만 명, 유권자의 12% 정도가 지워졌고, 모디 총리의 인도인민당(BJP)은 서벵골에서 처음으로 승리했다. (NPR) 선거 기간 마마타 바네르지 주총리는 이 싸움을 "벵골인 대 외부인"의 구도로 끌고 갔다. (The Wire) 명부 재검토가 다른 주로 확대되면서 이달 들어 시위는 뭄바이 등 전국으로 번졌고, 바네르지는 델리에서 연행됐다. (The Hindu)
남쪽에서는 의석 재배분이 문제다. 인구에 따라 하원 의석을 다시 나누면, 출산율을 일찍 낮춘 남부 주들은 의석을 잃고 인구가 많은 북부 주들이 의석을 얻는다. 타밀나두 주총리 스탈린은 올해 4월 재배분 법안을 "검은 법"이자 남부에 대한 "처벌"이라 부르며 법안 사본을 불태웠다. (ABC)
러시아: 이미 한 번 쪼개진 나라. 러시아는 원심력을 이미 겪어본 나라다. 푸틴은 2005년 연례 연설에서 소련 해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 부르며, 그 결과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이 국경 밖에 남게 됐다고 말했다. (BBC) 우크라이나 침공을 "원래 우리 땅"이라는 생각으로 읽는 시각은 이 연장선에 있다.
Jasper Chu, Russians in post-Soviet states. 소련 해체 후 러시아 밖의 옛 소련 국가 가운데 러시아계 또는 러시아어 사용자가 다수인 행정구역. CC0. 크기 조정 외 변경 없음.
그런데 전쟁의 비용은 고르게 나뉘지 않았다. 부랴트인은 러시아 인구의 0.3%인데,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 중에서는 1.16%를 차지한다. (Moscow Times) 인구 대비 전사자가 많은 상위 10개 지역 중 7곳이 소수민족 공화국이나 자치구다. (미 의회 청문회) 해외에서는 러시아를 수십 개 나라로 나누자는 '포스트 러시아 자유민족 포럼'이 열리고, 크렘린은 2023년 이 단체를 '바람직하지 않은 조직'으로 지정했다. (Wikipedia)
중국: 먼저 누르는 나라. 중국은 이 원심력을 가장 일찍, 가장 체계적으로 두려워한 나라다. 시진핑은 집권 직후인 2012년 12월 비공개 연설에서 소련 붕괴를 이렇게 평했다. 당원이 2천만 명이나 있었는데 "끝내 아무도 사내대장부가 아니었다(竟无一人是男儿)", 즉 나서서 싸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China Digital Times)
그래서 중국은 원심력이 커지기 전에 누른다. 올해 3월 통과돼 7월부터 시행된 「민족단결진보촉진법」은 시진핑 체제의 소수민족 동화 정책을 법으로 만들었다. 소련 해체 이후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소수민족을 따로 지정하는 제도 자체가 분열의 씨앗"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는데, 이 법은 그 흐름의 결과다. (Wikipedia)

'분리주의'보다는 '원심력'이다

네 나라를 나란히 놓고 보니 처음 가설을 조금 고쳐야 한다. 엄밀히 말해 네 나라 모두에 "분리 독립 운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분리 지지는 지역 정체성보다 당파성에 가깝다. 정권이 바뀌면 지지층도 바뀐다. 인도의 시위는 독립 요구가 아니라 중앙정부와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항의다. 서벵골에도 고르칼랜드처럼 주를 나누자는 오래된 운동은 있지만 (Kathmandu Post), 지금의 전국 시위와는 결이 다르다. 러시아는 안쪽의 분리주의보다 바깥으로 잃어버린 땅에 대한 집착이 더 크다. 중국만이 소수민족 분리주의를 정면으로 의식한다.
그래서 '분리주의' 대신 원심력이라는 말을 쓰려고 한다. 형태는 당파, 언어, 민족, 지역으로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중심이 주변을 하나로 묶어두던 접착제가 약해지고 있다. 큰 나라일수록 이 접착제가 많이 필요하다.

왜 하필 바깥을 향하는가

안이 흔들리는데 왜 바깥을 향해 소리를 키울까. 가장 흔한 설명은 전환 전쟁론이다. 국내 불만을 돌리려고 바깥에 적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설명은 생각보다 약하다. 정치학자 잭 레비는 역사학자들의 사례 연구는 이 설명을 자주 쓰지만, 정량 연구에서는 국내 갈등과 대외 분쟁 사이에 일관된 관계가 반복해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정리했다. (Levy)
나는 앞의 알레시나 모형을 거꾸로 읽는 쪽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개방된 세계가 큰 나라의 접착제를 녹였다면, 반대로 바깥 세계를 닫히고 위험한 곳으로 만들면 큰 나라에 붙어 있는 가치가 다시 올라간다. 관세 장벽, 진영 블록, 영향권 선언은 모두 "밖은 위험하니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는 조건을 만든다. 패권주의는 접착제를 바깥에서 사오는 방법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각국의 말투가 비슷한 이유가 보인다. 올해 1월 미군이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한 뒤 트럼프는 이를 "돈로 독트린"이라 불렀고, 국무부는 "이곳은 우리의 반구"라고 썼다. (ABC News) 크렘린은 서방이 러시아를 쪼개려 한다고 말하고, 러시아 정치학자 키네프는 해외의 '포스트 러시아' 포럼이 바로 그 선전에 주는 선물이라고 비판했다. (Wikipedia) 중국 공산당은 소련이 "적대적 외부 세력"의 사상 공세에 무너졌다고 가르친다. (ChinaTalk) 인도 여당은 명부 정리의 목적을 "침투자" 색출이라고 설명한다. (NPR) 네 나라 모두 바깥의 위협을 말하면서 안쪽의 경계를 다시 긋는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흐름'인가

복잡계 과학자 피터 터친은 역사 속 사회가 통합기와 해체기를 오간다고 본다. 불평등이 커지고, 엘리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자리보다 많아지면, 밀려난 엘리트가 대중의 분노를 모아 기존 질서에 맞선다는 것이다. 그는 2010년에 미국이 2020년 무렵 정치적 불안정의 정점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Turchin)
물론 터친의 이론은 논쟁적이다. 미국 데이터로 다시 검증해보니 핵심 예측이 지지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Georgescu) 그래서 "역사는 반드시 순환한다"는 식으로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열린 세계, 큰 나라가 굳이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던 시기는 세계사에서 오히려 예외에 가까웠다. 지금은 '갑자기' 이상해진 게 아니라, 그 예외가 끝나가는 중일 수 있다.

진통제는 병을 키우기도 한다

이 가설에는 분명한 약점이 있다. 패권주의가 원심력을 붙잡는 접착제라면, 실제로 원심력이 줄어야 한다. 그런데 결과는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러시아는 전쟁 비용을 소수민족 지역에 떠넘겼고, 그 지역에서 탈식민 운동의 목소리가 커졌다. 2022년 동원령 직후 다게스탄, 사하 같은 소수민족 공화국에서 반대 시위가 크게 일었고, 다게스탄의 수도 마하치칼라에서는 모스크바보다 10배 넘는 사람이 연행됐다. (Moscow Times) 미국에서는 트럼프 2기 들어 분리 독립 지지가 민주당 쪽에서 오르고 있다. 미네소타는 2년 사이 10%포인트, 코네티컷은 13%포인트 올랐다. (YouGov) 캘리포니아에서는 2028년 주민투표에 독립 여부를 올리려는 서명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Desert Sun) 인도의 명부 정리는 오히려 벵골 정체성 정치에 불을 붙였다.

1부 정리

"자연스러운 흐름"과 "망조"는 서로 반대말이 아니다. 둘 다 맞을 수 있다. 큰 흐름은 구조적이고 지도자 한 명이 만든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흐름에 대한 개별 대응은 병을 고치기보다 통증만 잠시 덮고, 그 사이 병을 키울 수 있다. 트럼프는 원인이라기보다 증상에 가깝다. 다만 증상도 병을 악화시킨다.
그러니 한국이 경계해야 할 것은 "트럼프만 지나가면 괜찮아진다"는 기대다. 원심력이 구조적이라면 다음 미국 대통령도, 다음 중국 지도자도 비슷한 문법으로 말할 가능성이 크다.

2부. 진통제 말고 치료제

원심력은 파이가 커지지 않는 곳에서 자란다

그렇다면 치료제는 무엇일까. 1부의 사례들을 다시 보면 원심력이 커지는 순간에는 공통된 말투가 있다. "내 몫을 저쪽이 가져간다." 인도 남부는 북부가 의석을 가져간다고 느끼고, 러스트벨트는 해안 도시와 중국이 일자리를 가져갔다고 느끼고, 러시아의 주변부는 모스크바가 아들들을 데려간다고 느낀다. 원심력은 파이가 커지지 않는 곳에서 자란다.
하버드의 경제학자 벤저민 프리드먼은 『경제성장의 도덕적 결과』에서 이 직관을 역사로 뒷받침했다. 생활 수준이 오르는 시기의 사회는 관용과 민주주의 쪽으로 기울고, 정체와 쇠퇴의 시기에는 불관용과 민족 갈등, 독재 쪽으로 기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작년보다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면 남과 덜 비교하지만, 나아지지 않으면 남과의 비교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Economist 서평)
피터 틸은 같은 이야기를 더 날카롭게 했다. 그는 2011년 에세이 「미래의 종말」에서 서구 민주주의의 타협은 "대부분의 사람이 대부분의 경우에 이길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데, 성장이 없는 세계에서는 그 전제가 무너진다고 썼다. (National Review) 올해 9월에는 "자식이 부모보다 잘살아야 한다"는 세대 간 계약이 깨졌다고 진단하며 이렇게 말했다. AI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AI가 없다면 극우와 극좌의 제로섬 정당들이 계속 힘을 얻을 것이라고. (Nasha Niva) 트럼프를 공개 지지했던 사람의 진단이라는 점은 아이러니지만, 진단 자체는 1부의 분석과 정확히 겹친다.

두려움으로 묶을 것인가, 기회로 묶을 것인가

알레시나의 틀로 다시 말하면 이렇다. 큰 나라를 하나로 붙잡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바깥을 위험하게 만들어 두려움으로 묶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쪽의 파이를 키워 기회로 묶는 것이다. 패권주의는 앞의 방법이고, 성장은 뒤의 방법이다. 앞의 것은 빠르지만 부작용이 크고, 뒤의 것은 느리지만 병을 고친다.
틸의 구분을 하나 더 빌리자. 그는 『제로 투 원』에서 이미 있는 것을 복제해 퍼뜨리는 수평적 진보(1에서 n)와 없던 것을 만드는 수직적 진보(0에서 1)를 나눴다. 수평적 진보의 대표가 세계화이고, 수직적 진보의 대표가 기술이다. (Zero to One) 지난 30년의 성장은 상당 부분 수평적이었다. 공장을 옮기고 공급망을 늘려 같은 물건을 더 싸게 만들었다. 그 수평적 성장이 남긴 청구서가 러스트벨트였다. 세계화가 뒷걸음질 치는 지금, 남은 길은 수직적 진보뿐이다.

AI는 치료제가 될 수 있을까

그 수직적 진보의 가장 유력한 후보가 지금은 AI다. 퍼지는 속도부터 다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5년 기준 국내 취업자의 51.8%가 업무에 생성형 AI를 쓰고 있고, 이 확산 속도는 과거 인터넷보다 최대 8배 빠르다. (한국은행)
하지만 여기서 낙관만 하면 1부의 교훈을 잊는 셈이다. 세계화도 전체 파이는 키웠다. 문제는 이익이 넓게 퍼지지 않고 손실이 특정 지역에 몰렸다는 것이었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권력과 진보』에서, 기술이 저절로 모두의 번영으로 이어진 적은 없으며 방향을 잘못 잡으면 소수의 엘리트만 이롭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MIT Shaping Work) AI가 몇몇 도시와 몇몇 회사에만 이익을 몰아준다면, AI는 치료제가 아니라 새로운 원심력이 된다.
그래서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한다. "AI가 성장을 가져올까"가 아니라 "AI의 성장이 어디로 흘러갈까"다. 틸 자신도 정체를 끝낼 가장 자연스러운 희망으로, 정보 기술이 비트의 세계를 넘어 원자의 세계로 번지는 것을 꼽았다. (Conversations with Tyler) 화면 속 챗봇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장과 집과 실험실,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 일하고 사는 곳까지 AI가 내려와야 파이가 넓게 커진다.

따라잡은 다음의 한국

1편의 제목을 나라 단위로 바꿔 보면 질문이 선명해진다. 따라잡은 다음,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나.
한국은 따라잡기로 큰 나라다. 남이 만든 것을 더 빨리, 더 싸게, 더 크게 만들어 세계 시장에 팔았다. 틸의 말로 하면 수평적 진보의 챔피언이었고, 알레시나의 말로 하면 열린 세계에서 번영한 작은 나라의 전형이었다. 세계 시장이 곧 우리 시장이었기에 5천만 인구로도 큰 산업을 키울 수 있었다.
그 두 조건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2025년 처음으로 2% 아래로 떨어졌다는 추정이 나왔고 (연합뉴스), KDI는 이대로라면 2040년대에는 0% 근처까지 내려갈 것으로 본다. 2010년대 성장률 하락분의 약 67%는 생산성 둔화 때문이었다. (KDI) 사람이 줄어드는 나라에서 남은 성장 엔진은 생산성, 곧 수직적 진보뿐이다. 그리고 큰 나라들이 문을 닫을수록 따라잡기 전략의 여지는 줄어든다. 2019년 일본의 소재·부품 수출 규제가 보여줬듯, 패권의 시대에는 기술 자체가 무기가 된다.
그렇다고 한국이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1편에서 한국 대기업은 연구가 떨어질 자리가 공장, 소재, 부품으로 흩어져 있어 Alphabet이나 Meta처럼 하기 어렵다고 썼다. 그런데 2부의 눈으로 보면 그 약점이 뒤집힌다. AI가 원자의 세계로 내려와야 한다면, 그 원자를 가진 쪽은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회사가 아니라 공장과 제품과 현장 데이터를 가진 제조 대기업이다. 모델을 가장 크게 만드는 경쟁에서는 이기기 어려워도, 모델을 현실에 가장 깊게 심는 경쟁에서는 해볼 만하다.

3부. 다시 연구소로

1편의 제언을 2편의 눈으로 다시 보면

1편에서 나는 LG AI연구원에 여섯 가지를 제언했다. 그룹의 문제 해결 엔진이 되자, 외부 모델을 재료로 쓰자, 돈의 주기를 나누자, 박사·인턴·엔지니어를 한 팀으로 묶자, 현장 반영을 세자, 한국에 돌려주자. 1편에서는 이것을 연구소가 살아남고 쓸모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썼다. 2편의 틀로 다시 보면 같은 제언에 세 겹의 의미가 더해진다. 아래도 모두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해석이다.
첫째, 주권이라는 보험. 1편에서 미국 모델이든 중국 모델이든 남의 모델에 기대는 쪽은 같은 공급 위험을 진다고 썼다. 패권의 시대에 이 위험은 더 커진다. LG AI연구원은 올해 7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 2차 모델로 7,500억 파라미터의 K-EXAONE 2.0을 상업적 이용 제한이 없는 Apache 2.0 라이선스로 공개했고 (LG AI Research), 8월에는 2차 단계평가를 통과해 3차로 진출했다. (서울경제) "외부 모델을 재료로 쓰자"는 제언과 충돌하지 않는다. 자급자족하자는 게 아니라, 문이 닫힐 때 쓸 수 있는 선택지를 우리 손에 쥐고 있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하는 일은 그 보험을 한 회사가 아니라 생태계 전체가 쓰게 만드는 일이다.
둘째, 원자의 세계로 내려가는 길. 1편의 첫 번째 제언, "외부 모델이 닿지 못하는 공정 데이터와 실험실과 기기 안의 문제를 풀자"는 말은 틸의 표현을 빌리면 비트에서 원자로 내려가자는 말이다. LG AI연구원은 이미 공정 품질을 예측하는 EXAONE Tabular, 외관 검사용 EXAONE Omni-Inspect, 신소재 발굴용 EXAONE Discovery 같은 산업 특화 모델을 내놓았다. (데일리뉴스) LG전자가 CES 2026에서 공개한 가정용 로봇 CLOiD의 핵심도 이미지와 영상을 언어로 이해하는 VLM,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VLA다. (LG전자) 신소재 발굴이 수직적 진보라면, 로봇과 공정 AI는 그 진보를 원자의 세계에 심는 일이다.
셋째, 확산.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LG의 공장은 창원, 구미, 오창, 여수 같은 도시에 있다. 연구원에서 만든 모델이 이 현장들에 실제로 들어가 생산성을 올린다면, AI의 이익은 판교와 강남에만 머물지 않는다. 1편에서 "현장 반영을 세자"고 썼을 때는 연구소의 성과 관리를 생각했다. 2편의 눈으로 보면 그 숫자는 AI의 이익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세는 숫자이기도 하다. 애쓰모글루가 말한 "기술의 방향"을 고르는 일을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회사 안에서 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벤치마크 1위와 실제 공장의 불량률 개선은 다른 이야기다.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이 결국 연구원의 진짜 과제다.

주니어 연구자의 자리에서

1편의 네 번째 제언에서 나는 박사, 인턴, 엔지니어를 한 팀으로 묶자고 썼다. 그 박사 중 한 명이 나다. 나는 박사 학위를 마치고 EXAONE Lab에 들어온 주니어 연구자이고, 언어 모델이 영상과 3D 공간을 이해하고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멀티모달 에이전트 연구를 한다.
나는 항상 내가 하는 생각들과 이야기들이 오늘, 내일의 내 할 일과 맞닿아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패권이나 원심력 같은 거대한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나 싶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사다리를 하나씩 놓아보니 생각보다 직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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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모델이 원자의 세계로 내려가려면 먼저 세상을 봐야 한다. 영상은 시간을, 3D는 공간을 이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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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모델이 있어야 로봇이 냉장고 문을 열고, 검사 장비가 불량을 찾고, 공정 AI가 현장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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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제품과 공정이 늘어야 생산성이 오르고, 생산성이 올라야 사람이 줄어드는 나라에서도 파이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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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가 커져야 "내 몫을 저쪽이 가져간다"는 말이 줄어든다. 그게 원심력에 대한 근본 처방이다.
물론 주니어 한 명의 논문이 패권의 시대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사다리를 의식하면 매일의 선택이 조금 달라진다. 몇 가지를 스스로에게 다짐해 둔다.
문제를 원자 쪽에서 고른다. 리더보드 점수를 0.5점 올리는 문제보다, 실제 로봇과 실제 공장이 막히는 지점을 먼저 묻는다. 1편에서 말한 "현장 문제이면서 논문이 되는 문제"를 고르는 연습이다.
정직하게 잰다. 벤치마크와 현장의 간극을 숨기지 않는 평가가 결국 가장 빨리 현장에 닿는 길이다.
밖으로 연다. 공개 모델, 논문, 대학원생 인턴과의 공동 연구는 회사 하나의 성과를 생태계의 역량으로 바꾼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들 사이에서 버티는 방법은 혼자 크게 만드는 것보다 같이 넓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맺으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큰 나라들이 큰소리를 내는 건 트럼프 한 사람의 망조라기보다, 안에서 커지는 원심력에 대한 진통제에 가깝다. 진통제는 빠르고, 그래서 정치가 먼저 꺼내 든다. 하지만 진통제는 병을 고치지 못하고, 때로는 병을 키운다.
치료제는 성장이다. 그리고 지금 그 성장을 만들 가장 유력한 도구가 AI다. 다만 AI의 이익이 넓게 퍼져야 치료제가 되고, 몇 곳에 몰리면 또 하나의 원심력이 된다. 한국은 그 차이에 누구보다 민감해야 할 나라다. 열린 세계 덕분에 컸고, 닫히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흔들릴 나라이기 때문이다.
틸은 정체가 언제 끝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정체가 끝나는 것은 자동으로 정해진 일이 아니며, 사람들이 끝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Conversations with Tyler) 진통제는 정치가 처방한다. 치료제는 누군가 실험실과 공장에서 직접 만들어야 한다.
1편은 이 질문으로 끝났다. 이 연구가 어느 현장의, 누구의 일을 바꿨는가. 2편은 질문을 하나 더 얹고 끝내려 한다. 그 일이 바뀐 사람은 이제 "내 몫을 저쪽이 가져간다"고 덜 말하게 되었는가. 나는 그 대답을 만드는 일의 아주 작은 일부이고 싶다.

참고자료

1부. 원심력과 패권주의
2부. 성장과 AI
3부.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