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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다시 굴러떨어지고, 물은 계속 흐른다

부제
카뮈에서 《진격의 거인》, 낙천적 허무주의, 《도덕경》까지
URL
작성일
2026/08/25
알베르 카뮈, 1957. 사진: United Press International / Library of Congress. Wikimedia Commons(미국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lbert_Camus,_gagnant_de_prix_Nobel,_portrait_en_buste,_posé_au_bureau,_faisant_face_à_gauche,_cigarette_de_tabagisme.jpg

본문

※ 《이방인》, 《페스트》, 《진격의 거인》의 중요한 내용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시지프의 돌은 산꼭대기에 닿을 때마다 다시 굴러떨어진다. 강물은 그 돌을 피해, 혹은 감싸며 계속 흐른다.
같은 풍경을 카뮈와 노자에게 보여주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말을 할 것 같다. 카뮈는 돌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똑바로 보면서도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노자는 한참 물살을 살피다가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돌을 꼭 밀어야 하는가?”
물론 이것은 노자의 실제 문장이 아니라 내가 멋대로 상상한 질문이다. 하지만 최근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은 정말 그곳까지 흘러갔다. 《시지프 신화》를 지나 《진격의 거인》으로, 다시 낙천적 허무주의와 《도덕경》으로.
처음의 질문은 단순했다.
삶에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면, 왜 계속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끝에 가서는 질문이 조금 달라졌다.
세계가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는 반드시 세계와 싸워야 하는가?

세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살인뿐 아니라 감정 때문에 재판받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으며, 다음 날에는 마리와 수영을 하고 희극 영화를 보았다. 법정은 어느 순간 “왜 사람을 죽였는가”보다 “왜 우리처럼 슬퍼하지 않았는가”를 더 집요하게 묻는다.
그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유죄다. 그러나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을 연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물이 된다. 가족, 사랑, 결혼, 야망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를 공유하지 못하는 그는 인간 사회의 의미 체계에서 이방인이다.
사형을 기다리는 뫼르소에게 신부가 찾아오자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 신부는 신과 구원, 죽음 너머의 의미를 말한다. 뫼르소에게 그것은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부르는 일이다. 그에게 확실한 것은 자신이 살아 있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뿐이다.
격렬한 충돌이 지나간 뒤 그는 오히려 평온해진다. 자신이 죽어도 별은 빛나고 밤공기는 흐를 것이다. 세계는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뫼르소는 마침내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카뮈의 부조리가 드러난다. 부조리는 단순히 “세상에는 의미가 없다”는 명제가 아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지, 선한 사람에게 왜 불행이 닥치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계는 침묵한다.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세계의 충돌, 그 긴장이 부조리다.
《시지프 신화》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묻는다. 삶이 살 가치가 있는가. 결국 모두 죽고 우주가 우리에게 어떤 목적도 보증하지 않는다면 왜 계속 살아야 하는가.
카뮈는 자살을 거부한다. 자살은 부조리를 해결하는 대신 부조리를 이루는 한쪽, 질문하는 인간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신이나 초월적 진리로 건너가는 일부 사상가의 ‘철학적 자살’도 거부한다. 이성으로 궁극적 의미를 알 수 없다고 인정해놓고 마지막 순간에 초월적 해답을 가져오는 것은 긴장을 견디지 못한 도약이라는 것이다.
그가 택한 것은 반항이다. 답이 없다는 사실을 흐리지 않고도 계속 살아가는 것. 모르는 것을 안다고 꾸미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없애지도 않는 것. 카뮈의 시지프는 돌이 또 떨어질 것을 알면서 산 아래로 내려간다. 신들은 그의 형벌을 정할 수 있지만 그 형벌을 대하는 의식까지 지배하지는 못한다.
《페스트》에 이르면 이 개인적 반항에 타인이 들어온다. 오랑에 전염병이 번지고 도시가 봉쇄된다. 리외는 환자를 치료하고, 타루는 자원 방역대를 만든다. 탈출하려던 랑베르는 결국 도시에 남는다. 반면 파늘루 신부는 처음에 페스트를 죄에 대한 신의 형벌로 해석한다.
그러나 죄 없는 아이가 처참하게 죽는 광경 앞에서 그 설명은 흔들린다. 리외에게 중요한 것은 페스트가 왜 존재하는지 해석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죽고 있다. 그러니 치료한다.
페스트균에는 의도가 없다.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그저 번식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그것은 악처럼 경험된다. 더 무서운 것은 질병만 전염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포와 혐오, 폭력과 복수도 사람을 타고 번진다. 정의를 위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순간, 나 역시 페스트를 옮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페스트》의 질문은 “악을 어떻게 완전히 물리칠 것인가”보다 더 어렵다.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페스트를 옮기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페스트는 물러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균은 숨어 있다가 돌아올 수 있다. 악도, 전체주의도, 전쟁도 그렇다. 승리는 영원하지 않다. 그런데도 리외는 다음 환자를 치료한다. 카뮈의 부조리는 여기에서 개인의 반항을 넘어 연대의 윤리가 된다.

반항은 정말 필연적인가

여기까지의 카뮈는 아주 멋있다.
세계는 침묵한다. 그래도 산다. 돌은 다시 떨어진다. 그래도 민다. 다른 사람이 죽어가면 함께 페스트와 싸운다.
그런데 내게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
세계에 궁극적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서 “그러므로 죽어서는 안 된다”가 논리적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반항해야 한다”도 마찬가지다. 살아갈 수도 있고, 신을 믿을 수도 있고, 쾌락을 좇을 수도 있으며, 결론을 유보한 채 계속 탐구할 수도 있다. 부조리 자체는 그중 어느 하나를 골라주지 않는다.
카뮈의 답을 최대한 공정하게 다시 세워보면 이렇다. 부조리는 인간의 요구와 세계의 침묵 사이의 긴장이다. 자살은 인간을 지우고, 초월적 도약은 침묵을 가상의 대답으로 덮는다. 그러므로 부조리를 부조리인 채 유지하는 일관된 태도는 답이 없음을 의식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논리는 충분히 강하다. 실제로 《반항하는 인간》에서 카뮈는 “삶이 부조리하다”고 말하는 의식이 있으려면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자신의 논리를 밀고 간다. 그러나 그것이 곧 명료함이 신앙이나 위안, 망각보다 언제나 우월하다는 증명은 아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의 카뮈 항목도 카뮈가 삶의 의미에 관한 결론을 의심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답을 주장하는 긴장을 지적한다.
왜 자기기만보다 명료함을 택해야 하는가. 왜 “알 수 없지만 믿겠다”는 사람보다 “알 수 없으니 알 수 없는 채 살겠다”는 사람이 철학적으로 우월한가. 답을 정하지 않고 계속 탐구하는 사람도 이미 하나의 삶을 선택한 것 아닌가. 선택하지 않겠다는 태도조차 시간이 흐르는 세계에서는 선택이 된다.
결국 카뮈도 어느 순간 가치를 고른다.
나는 자기기만보다 명료함을 택하겠다. 죽음보다 삶을, 체념보다 반항을 택하겠다.
그렇게 읽으면 카뮈는 부조리에서 하나의 필연을 증명한 철학자라기보다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갈 강력한 태도를 제안한 작가에 가깝다.
“부조리하다면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이렇게 살아가겠다.”
이렇게 읽을 때 오히려 나는 카뮈가 더 좋아진다. 증명이 멈춘 자리에서 그의 문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다에 도착한 에렌과 산 아래로 내려가는 시지프

카뮈를 읽다가 《진격의 거인》이 떠오른 것도 이 지점이었다.
이야기 초반의 세계는 말 그대로 부조리하다. 인간은 벽 안에 갇혀 있고, 벽 밖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 있다. 왜 거인이 존재하는지, 왜 자신들이 갇혀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선하게 살았다고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벽이 무너지고 가족이 죽는다.
에렌의 첫 대답은 명백하다. 반항한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거인을 없애며 벽 밖으로 나가 자유를 찾으려 한다. 이때의 에렌은 꽤 카뮈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벽 밖에 나가면 답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바다에서 무너진다. 바다 건너에도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섬의 사람들을 적으로 여긴다. 거인이라는 명백한 괴물 뒤에서 훨씬 복잡한 것들이 나타난다. 역사, 민족, 선전, 기억, 공포, 보복. 무엇보다 모두에게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기서 《진격의 거인》은 《페스트》와 만난다. 대체 누가 페스트인가. 마레인가, 엘디아인가, 에렌인가.
카뮈식으로는 질문을 바꿔야 할지 모른다. 누가 본질적으로 악한가가 아니라, 지금 누가 다른 사람에게 페스트를 옮기고 있는가. 부모 세대의 공포가 자식에게 전달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며, 가해자의 자식은 다시 피해자가 된다. 누구나 자기 폭력을 방어라고 부르고, 더 큰 대의를 위해 타인의 죽음을 허용하기 시작한다.
후기의 에렌은 세계의 부조리를 외면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버린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반항은 어느 순간 “세상이 부당해도 굴복하지 않겠다”에서 “세상이 부당하니 세상을 파괴해서라도 바꾸겠다”로 넘어간다. 반항이 처음 거부했던 폭력을 닮기 시작한다.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경계한 것도 이 변질이다. 미래의 정의를 위해 지금 눈앞의 사람을 수단으로 만들 때, 반항은 혁명적 살인의 논리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리외와 가까운 인물은 오히려 아르민이나 한지일지 모른다. 완벽한 해답도 영원한 평화도 보장할 수 없지만, 대화를 시도하고 한 명이라도 덜 죽을 방법을 찾는다.
평생 꿈꾼 바다에 도착한 에렌은 산 정상에 오른 시지프와 닮았다. 목표에 닿는 순간, 돌은 다시 굴러떨어졌다. 둘의 차이는 그다음에 생긴다.
시지프는 다시 산 아래로 걸어간다.
에렌은 돌이 굴러떨어지는 세계 자체를 없애려 한다.
아마 그것이 《진격의 거인》의 비극일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 허무주의

계속 부조리와 싸우고 반항하다 보면 솔직히 조금 피곤해진다. 그래서 나는 ‘낙천적 허무주의’라고 불리는 태도에도 끌린다.
내가 이 말을 강하게 기억하게 된 계기는 쿠르츠게작트의 2017년 영상 〈Optimistic Nihilism〉이었다. 낙천적 허무주의는 경계가 분명한 철학 학파라기보다, 거대한 우주 속 인간의 무의미함을 해방감으로 바꾸는 대중적인 태도에 가깝다.
우주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고,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시간 앞에서 찰나다.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수십억 년 뒤에는 지구조차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이 생각이 무섭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런데 질문을 뒤집으면 이상하게 편해진다.
“그렇게까지 영원한 의미가 필요해?”
우주가 내 삶의 목적을 정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도 된다. 실패는 우주적 비극이 아니고, 한때의 창피한 기억도 결국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먹고, 재미있는 것을 만들고, 여행하고, 게임하고, 책을 읽다가 잠들어도 된다.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지금의 순간을 덜 가치 있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더 귀하게 만들 수 있다.
카뮈와 출발점은 놀랄 만큼 비슷하지만 정서가 다르다.
카뮈는 말한다. 우주는 궁극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가며 반항하겠다.
낙천적 허무주의자는 말한다. 정해진 답이 없다. 그러니 너무 심각해하지 않아도 되겠다.
카뮈에게 무의미는 긴장을 유지해야 할 대상이다. 낙천적 허무주의자에게 무의미는 긴장을 풀어주는 사실이다. 시지프를 놓고 보면 차이는 더 선명하다.
“그래, 어차피 또 떨어질 텐데 내려가는 길에 경치라도 보자.”
나는 솔직히 이쪽이 꽤 마음에 든다. 다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나의 실패를 가볍게 보는 태도와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보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내려가는 길의 경치를 즐기는 건 좋지만, 누군가 돌에 깔려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페스트》가 낙천적 허무주의에 보태는 윤리적 제동은 바로 이것이다.
우주적 의미가 없더라도 지금 아픈 사람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가볍게 살되, 가볍게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노자는 질문 자체를 내려놓는다

여기까지 생각한 뒤 《도덕경》을 가져오면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 카뮈와 낙천적 허무주의자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지만 같은 질문을 공유한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카뮈는 인간이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가 대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낙천적 허무주의자는 궁극적인 의미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데 노자는 둘 모두에게 이렇게 물을 것 같다.
“의미가 있다, 없다는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도덕경》은 시작부터 이름 붙이는 일을 의심한다.
道可道 非常道
말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삶은 의미 있다’와 ‘삶은 의미 없다’의 대립 역시 인간이 세계에 붙인 이름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카뮈의 부조리는 조금 낯설어진다. 인간이 우주에 의미를 요구했는데 우주가 대답하지 않아서 생긴 충돌이라면, 노자는 먼저 물을 것이다.
애초에 우주가 왜 대답해야 하는가?
꽃은 피고, 물은 흐르며,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 거기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목적이 없다고 해서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부조리는 세계의 속성이라기보다 세계가 나에게 설명되어야 한다는 기대에서 생기는 것 아닐까.
카뮈의 핵심어가 반항이라면 노자의 핵심어 중 하나는 무위(無爲)다. 다만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억지로 꾸미거나 흐름을 거슬러 과잉으로 행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도덕경》과 도가 철학을 설명하는 자료도 무위를 ‘무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비강제적인 행위로 해석한다.
《도덕경》은 물을 반복해 바라본다.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바위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는다. 벽을 만나면 돌아가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면 바위가 깎여 있다.
카뮈는 돌이 떨어져도 다시 밀겠다고 말한다. 내가 상상한 노자는 그 모습을 보며 묻는다. 그 돌은 왜 밀고 있는가. 밀어야 한다면 밀고, 떨어지면 내려가 다시 밀면 된다. 하지만 그것을 반드시 ‘운명에 맞선 나의 위대한 반항’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페스트》의 리외가 카뮈의 철학적 언어보다 오히려 노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리외는 세계를 구원하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악을 최종적으로 물리치겠다거나 자신이 영웅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환자가 오면 치료한다. 다음 환자가 오면 또 치료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결과를 완전히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낙천적 허무주의와 노자도 얼핏 닮았다. 둘 다 과도한 집착과 비장함을 덜어낸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낙천적 허무주의자는 여전히 “우주에는 본질적 의미가 없다”는 꽤 강한 명제를 쥐고 있다. 노자는 그것마저 내려놓으라고 할 것 같다.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
모른다. 어쩌면 그 구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돌을 밀고, 경치를 보고, 물처럼 흐르기

나는 여전히 카뮈의 태도를 좋아한다. 특히 《페스트》에 이르면 그의 철학은 값싼 허무주의와 완전히 갈라진다. 사람은 결국 죽고 페스트는 언젠가 돌아오며, 오늘의 노력이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
다만 카뮈가 초월적 도약을 ‘철학적 자살’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여전히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믿는 사람도, 계속 탐구하는 사람도, 반항하는 사람도 선택한 것이다. “잘 모르겠는데 일단 오늘을 살지 뭐”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다.
그 점에서 나는 카뮈보다 낙천적 허무주의에 조금 더 가깝다. 하지만 《도덕경》을 읽으면 다시 한 발 물러나게 된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조차 내가 너무 꽉 쥐고 있던 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없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꼭 세계에 맞서야 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을 체념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돌을 밀어야 한다면 밀고,
내려가는 길에는 경치를 보고,
살려야 할 사람이 앞에 있으면 일단 살리고,
좋은 날이면 좋은 밥을 먹는다.
그 뒤에 우주적 의미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어쩌면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세 사람의 말을 내 식으로 바꾸면 결국 세 문장이 남는다.
카뮈: 답이 없어도 나는 돌을 민다.
낙천적 허무주의자: 답이 없으면 어때. 내려가는 길에 경치나 보자.
노자: 돌과 싸우느라 물이 흐르는 것을 놓치지는 마라.
이것들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이 긴 생각을 압축한 내 문장들이다.
그리고 카뮈에서 시작해 《진격의 거인》과 우주의 무의미를 거쳐 노자까지 왔으니, 마지막은 책 추천으로 끝내는 것이 적절하겠다.
《삼체》와 《사신의 영생》의 영어 번역자로도 잘 알려진 SF 작가 켄 리우는 2024년 《Laozi’s Dao De Jing: A New Interpretation for a Transformative Time》을 출간했다. 켄 리우의 공식 소개에 따르면 종이책은 2024년 8월 20일 출간됐고, 그의 번역 작품 목록에도 《삼체》, 《사신의 영생》과 함께 올라 있다.
《삼체》를 번역한 사람이 《도덕경》도 번역했다니 묘하게 이 글의 결말과 잘 어울린다. 우주의 광막함과 인간 문명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다가, 카뮈를 지나, 거인을 지나, 마지막에는 노자라니.
그러므로 이 긴 글의 결론은…… 켄 리우의 《도덕경》을 읽어보자는 것이다.
철학적 논증의 결론치고는 다소 상업적이지만, 뭐 어떤가.
우주에는 어차피 정해진 결론도 없는데.

참고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