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돈이 충분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라.
처음 들으면 속물적인 농담처럼 들린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돈으로 건강을 살 수 없고,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고, 진심을 강요할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런데도 이 말이 끈질기게 살아남는 이유는, 냉소 속에 묘한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돈은 가능성이다. 누군가에게 돈은 한 끼 식사이고, 누군가에게는 한 달의 생존이며, 누군가에게는 시간을 사는 방법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람을 모으고 제도를 만들고 산업을 바꾸는 힘이다. 같은 이름을 쓰지만 1만 원과 100만 원과 10억 원과 1조 원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1. 사랑이라는 이상한 힘
인본주의의 시대에 사랑은, 자본주의 시대의 돈만큼이나 이상한 힘을 가진다.
사람을 움직이고, 방향을 바꾸고, 삶의 우선순위를 재배치하고, 때로는 생존하게 만들며, 때로는 죽음 앞에서도 무언가를 계속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밥을 차리고,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병원 복도에서 밤을 새우고,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낯선 사람을 돕고,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자기 삶의 궤도를 통째로 바꾼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인가?
어쩌면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이 문장은 위험하다. 아주 쉽게 폭력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더 참으라고, 더 희생하라고, 더 견디라고 요구하는 문장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러니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충분히 사랑한다"는 감정의 강도를 올리라는 뜻이 아니다. 더 울고, 더 매달리고, 더 희생하고, 더 용서하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2. 충분한 사랑은 뜨거움이 아니라 운용 능력이다
충분한 사랑은 단순히 마음이 뜨거운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이고, 훈련이고, 판단력이고, 때로는 거리두기이며, 때로는 제도 설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내 감정의 연료로 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함께 고민하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자주 "느낌"으로만 이해한다. 심장이 뛰면 사랑이고, 보고 싶으면 사랑이고, 서운하면 사랑이고, 질투하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원재료일 수는 있어도 사랑 그 자체는 아니다. 밀가루가 있다고 빵이 생기는 것이 아니듯, 애틋함이 있다고 사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3. 큰돈에는 중력이 생긴다
돈으로 돌아가 보자.
100만 원을 다루는 사람과 100억 원을 다루는 사람과 1조 원을 다루는 사람은 서로 다른 종류의 능력을 요구받는다. 100만 원으로는 물건을 산다. 100억 원으로는 사람을 고용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1조 원으로는 시장 자체를 흔들 수 있다.
작은 돈은 시장 안에서 조용히 움직이지만, 큰돈은 시장 자체에 흔적을 남긴다. 금융에서는 이를 시장 충격(market impact)이라고 부른다. 충분히 큰 주문은 그 자체로 가격을 움직여서, 사는 행위가 사려던 가격을 올려버린다. 너무 큰 자본은 사람들의 기대를 바꾸고, 너무 큰 투자는 산업의 경로를 바꾼다.
요컨대 큰돈에는 중력이 생긴다.
돈이 많아질수록 "무엇을 살 것인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 돈이 흘러 들어갔을 때 어떤 시스템이 바뀌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거대한 자본에는 더 높은 수준의 윤리와 상상력과 통제 능력이 요구된다. 돈이 커질수록, 돈은 수단이 아니라 환경이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4. 사랑의 내연과 외연
처음 사랑은 대개 한 사람을 향한다. 연인, 가족, 친구, 반려동물, 혹은 자기 자신. 이 단계의 사랑조차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한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데에도 자주 실패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를 통제하고, 걱정한다는 이름으로 불안을 전염시키고,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상대의 선택권을 빼앗고, 친밀하다는 이유로 예의를 생략한다.
개인 간의 사랑조차 어려운 시대에, 더 큰 스케일의 사랑은 얼마나 어려운가. 가족을 넘어 이웃을, 이웃을 넘어 도시를, 도시를 넘어 사회를 사랑하는 일. 나와 닮은 사람뿐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까지, 내 편뿐 아니라 내 편이 아닌 사람의 고통까지 현실로 받아들이는 일. 이것은 마음씨가 착한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사랑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연의 사랑은 깊어지는 사랑이다. 한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오래 바라보고, 더 섬세하게 돌보는 능력이다. 외연의 사랑은 넓어지는 사랑이다. 내가 직접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나의 윤리적 세계 안에 포함시키는 능력이다.
많은 사람이 둘 중 하나에서 멈춘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헌신적이지만 낯선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하거나,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옆 사람에게는 잔인하다. 진짜 어려운 것은 둘을 함께 키우는 일이다.
5. 프롬: 사랑은 기술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1956년에 쓰였는데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롬은 사랑을 낭만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로 다룬다. 그는 사랑을 수동적으로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익히고 연마해야 하는 능동적 활동으로 본다. [1] 우리는 보통 사랑을 "받는" 문제로 생각하지만, 프롬에게 더 근본적인 것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느냐다.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보다, 내가 사랑할 능력을 갖췄느냐가 먼저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불편하지만 해방적이다. 불편한 이유는 사랑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해방적인 이유는,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 존재의 결함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서툴렀다면 배울 수 있고, 무지했다면 알 수 있고, 미숙했다면 훈련할 수 있다.
프롬이 말하는 성숙한 사랑은 네 가지 요소 위에 선다. [2]
돌봄, 책임, 존중,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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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없는 사랑은 공허하다. 상대의 실제 필요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자기감정에 취한 상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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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없는 사랑은 가볍다. 아무런 행동의 무게를 지지 않으려 한다면, 그 사랑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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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 없는 사랑은 위험하다. 상대를 위한다는 이유로 자유를 침범하기 시작하면, 사랑은 아주 쉽게 소유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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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 없는 사랑은 눈이 멀기 쉽다. 상대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랑은, 결국 자기 상상 속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된다.
프롬은 이 넷이 따로 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앎이 없으면 존중할 수 없고, 돌봄과 책임은 앎의 안내를 받지 못하면 맹목이 되며, 앎은 관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공허하다는 것이다.2 이 넷이 균형을 이룰 때 사랑은 비로소 감정에서 기술로 이동한다.
6. 사랑이 커지면 제도가 된다
그리고 사랑의 스케일이 커질수록, 이 네 가지는 전혀 다른 난이도가 된다.
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그 사람의 표정을 보면 된다. 하지만 천 명을 돌보는 일에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한 사람에게 책임지는 일은 약속을 지키면 되지만, 한 사회에 책임지는 일은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한 사람을 존중하는 일은 그의 말을 들어주는 데서 시작되지만, 다수를 존중하는 일은 절차와 권리와 투명성과 견제 장치를 요구한다.
프롬의 요소 | 한 사람을 향할 때 | 사회를 향할 때 |
돌봄 | 표정을 읽는다 | 복지·의료 시스템을 만든다 |
책임 | 약속을 지킨다 | 제도를 설계한다 |
존중 | 말을 들어준다 | 권리·절차·견제 장치를 둔다 |
앎 | 대화로 안다 | 데이터·현장·역사로 안다 |
그러므로 큰 사랑은 큰 감정이 아니라 큰 구조다.
사랑이 커질수록 사랑은 제도와 닮아간다. 병원, 학교, 복지, 법, 도시계획, 장례, 상담, 공공도서관, 공원, 안전망. 이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의 외주화된 형태다. 우리는 모든 아이를 직접 안아줄 수 없어서 학교를 만들고, 모든 아픈 사람의 병상을 지킬 수 없어서 병원을 만들고, 모든 외로운 사람을 찾아갈 수 없어서 공동체와 의례와 공공 공간을 만든다.
7. 드 보통: 큰 사랑을 다루는 오래된 운영체제
여기서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가 흥미로운 입문서가 된다.
드 보통은 종교의 초자연적 교리는 명백히 틀렸다고 단언하면서도, 종교가 인간을 다루는 방식에는 세속 사회가 훔쳐 와야 할 좋은 아이디어가 가득하다고 말한다. [3] 종교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잊고, 얼마나 자주 무너지고, 얼마나 반복적으로 위로받아야 하며, 얼마나 구체적인 형식을 통해서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세속 사회는 종종 인간에게 너무 많은 자율성을 맡긴다.
좋은 사람이 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죽음을 기억하세요. 가끔 감사하세요.
말은 맞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추상적인 문장만으로는 잘 변하지 않는다. 드 보통의 표현을 빌리면, 세속 사회는 우리가 모두 성숙한 어른이라고 가정하지만,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일깨워줘야 하는 큰 아이들에 가깝다. [4] 우리는 달력에 적힌 날, 함께 먹는 식사, 정해진 시간에 반복되는 모임, 죽음을 애도하는 절차, 낯선 사람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언어 같은 것들을 통해 조금씩 변한다.
종교의 순기능 중 하나는 분명하다. 종교는 사랑을 개인의 즉흥적 감정으로 방치하지 않고, 반복 가능한 형식으로 만든다. 매주 모이게 하고, 함께 밥을 먹게 하고, 아픈 사람을 방문하게 하고, 죽은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인간이 혼자서는 잘 못 하는 일들을 공동의 리듬 안에 넣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입문자용 튜토리얼에 가깝다. 사랑이 어렵다면, 더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
큰 사랑은 선의가 아니라 인프라다.
8. 사랑의 언어로 짓는 감옥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돈이 많다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돈이 커질수록 한 사람의 탐욕은 더 많은 사람의 삶을 망칠 수 있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의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증오의 언어만으로 조종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사랑의 언어로 더 깊이 묶인다.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선택받았다. 여기만이 너의 진짜 가족이다. 더 큰 사랑을 위해 작은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겉으로는 따뜻하지만, 어느 순간 사람을 감금하는 문장이 될 수 있다. 역사는 이를 여러 번 보여주었다. 신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었고,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자가 제거되었고, 인류를 향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제 인간들이 희생되었다.
그래서 사랑이 커질수록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랑이 구체적인 한 사람의 존엄을 보존하고 있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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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사랑한다면서 눈앞의 인간을 짓밟는 사람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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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사랑한다면서 구성원의 이탈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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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사랑한다면서 가족의 자유를 압수하는 사람도 위험하다.
존중 없는 돌봄은 보호가 아니라 지배가 되고, 앎 없는 책임은 헌신이 아니라 오만이 되며, 돌봄 없는 이념은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이 된다. 프롬이 네 요소의 균형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무리: 충분한 사랑은 자유의 편에 선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을 이렇게 다시 쓰고 싶다.
충분히 뜨겁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충분히 배운 적이 없고, 충분히 훈련하지 않았고, 충분히 구조화하지 않았고,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고, 충분히 구체적인 사람을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랑은 감정의 총량이 아니라 역량의 총합이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낭만화한 나머지, 사랑에 실패하면 마음이 부족했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부족한 것은 마음이 아니라 방법이다. 돈을 선하게 쓰려면 회계와 검증과 우선순위와, 때로는 투자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을 선하게 쓰려면 언어와 절제와 절차와, 때로는 물러설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가? 있을 것이다. 사랑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사랑만으로 암을 치료할 수 없고, 사랑만으로 월세를 낼 수 없고, 사랑만으로 전쟁을 멈출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왜 치료해야 하는지, 왜 월세를 낼 수 있는 삶이 보장되어야 하는지, 왜 전쟁을 멈춰야 하는지조차 잃어버린다.
사랑은 모든 문제의 직접적인 답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답을 찾게 만드는 최초의 동력이다. 그리고 충분히 훈련된 사랑은 감정에서 행동으로, 행동에서 습관으로, 습관에서 제도로, 제도에서 문화로 이동한다. 그때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이 된다.
돈이 커지면 중력이 생기듯, 사랑도 커지면 중력이 생긴다. 작은 사랑은 한 사람의 하루를 바꾸고, 더 큰 사랑은 공동체의 규칙을 바꾸고, 아주 큰 사랑은 한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방식을 바꾼다. 그러나 중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위험하다. 끌어당길 수도 있지만, 짓누를 수도 있다.
그러니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자.
정말로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끼는가?
어쩌면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다만 그 말의 의미는 더 불타오르라는 뜻이 아니다. 더 배워야 하고, 더 섬세해져야 하고, 더 넓어져야 하고, 더 책임져야 하며,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해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성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다.
큰 사랑은 선의가 아니라 인프라다.
그리고 충분한 사랑은, 언제나 자유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Reference
[1] Erich Fromm, The Art of Loving (1956) — 사랑을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배우고 연마해야 하는 능동적 기술로 규정. https://en.wikipedia.org/wiki/The_Art_of_Loving
[2] Erich Fromm, The Art of Loving — 사랑의 네 가지 기본 요소(돌봄·책임·존중·앎)와 그 분리 불가능성에 관한 논의.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등 국역본 다수)
[3] Alain de Botton, Religion for Atheists: A Non-believer's Guide to the Uses of Religion (2012) — 종교의 교리를 거부하더라도 공동체·의례·도덕 교육의 형식은 세속 사회가 차용할 만하다는 주장. https://www.alaindebotton.com/religion/
[4] Alain de Botton, TED Blog 인터뷰 — 세속 사회는 모두를 성숙한 어른으로 가정하지만, 인간은 반복적 환기가 필요한 존재라는 논점. https://blog.ted.com/faq-with-alain-de-botton-on-religion-for-atheists/
